네 그렇게 마지막 화가 왔습니다. 마지막 회차가 되니 제 여행도 끝이 나네요. 많이 아쉽고 돌아가는 길이 두렵기도 한데요. 공항에서 오랜만에 한국어를 많이 들으니까 막 소름 끼치고 움츠러들고 그랬어요. 그래도 올해 말까지 한국에서 재밌는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힘을 내보도록 할게요.
여행 가기 전에 종종 이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두달 동안 다녀오면 나는 변해있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뭐 그렇게 크게 변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한 것 같아요. 우선 날짜도 변했고, 날씨도 변했고, 피부가 약간 더 까매졌고 검은머리가 많이 자라났어요. 물론 이런 것도 변했는데 제가 느끼는 것도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삶은 이렇게 살아봐도 되는구나 싶은 게 많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씩 사라졌고, 하고 싶은 것들이 좀 더 분명해졌어요. 좀 더 자유롭게 꿈꿔볼 것이고, 외롭고 힘들 때마다 친구들을 더 자주 찾을래요.
종종 늦었는데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고맙습니다.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완성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네요. 메일 안 올 때마다 재촉해준 친구들 고맙습니다. 덕분에 ‘그래… 해야지…’ 하며 일어날 때가 있었어요. 제 글을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해주신 분들, 다른 글도 보고 싶다고 해주신 분들도 고맙습니다. 이 쓸데 없는 고민들과 마구 찍어대는 사진이 쓸모가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어요. 다음 여행에서 또 할 수 있다면 마음 단단히 먹고 해내고 싶어요. 그만큼 저에게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180명이나 신청해주셨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바르셀로나에 내리니 수많은 분들이 신청 폼 오류를 알려주셔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때만 해도 80명 정도였는데 이렇게 쑥쑥 늘었네요. 80명에도 놀라서 기뻐하던 게 생각이 납니다. 물론 여러분 모두가 제 글에 만족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 마음에 안드는 부분도 많았겠죠. 그래도 전 이 메일링의 목표를 잊지 않기 위해 아주 솔직하게 썼습니다. 하루에 몇 분이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었었으면 좋겠네요. 여러분들이 읽고 조금씩이라도 웃을 수 있었으면 그걸로 매우 기쁩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제 곧 제 생일이기도 하고요, 10월 초에 그라스에서 만났던 뉴욕 커플이 한국에 놀러와요. 같이 서울 돌아다니면서 놀 거에요. 10월 말에는 오랜만에 춤 공연을 합니다. 무릎 때문에 오랫동안 춤을 쉬었는데 요즘 상태를 봐서 즐거운 마음으로 슬쩍 다시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꾸준히 하지는 못하고요. 또 11월에는 제 친구가 무려 한국에서 퀴어 결혼식을 해요! 그래서 거기도 갑니다. 어떤 역할을 맡을 예정이에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정말 심심할 틈이 없겠군요. 일자리도 다시 알아봐야 하니 바쁘겠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럼 마지막화 보냅니다. 그동안 못 봤던 분들 한국에서 만나요. 안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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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마무리는 일부러 7화 말고 8화에 실었어요. 7화에 실었으면 깔끔하게 딱 맞아 떨어졌을텐데 좀처럼 쉽게 감상을 적기가 어렵더라고요. 베를린이 너무 좋기도 했고 여행 막바지라 정리하고 떠내보내기가 쉽지 않았네요. 그래서 이번화는 마무리에 마무리가 줄줄이 이어지는 화가 됐어요. 어째 글이 다 기네요. 원래 말이 많은데 더 많아졌어요. 마지막이라 그런 거니 이해해주시기를…
9.25.일 저녁 7시 비행기 안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음. 날씨도 맑았음.
이제 베를린을 떠난다. 하아. 정말 좋은 엉망의 시간을 보냈다. 베를린에서 보낸 8일이 사실 한달처럼 느껴진다. 정말 우여곡절의 일주일을 보냈구나. 계획 하나 없이 급하게 와서 예약도 제대로 못하고 숙소도 네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래서 안 피곤한 날이 없었지만 그래도 신기하게 굴러가기는 한다. 진짜 압축적으로 이것저것 다 한 시간이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우연한 시간들을 보내고 신묘하게 닿은 인연들과 다시 만났다. 처음엔 모든 게 싫었는데 지금 이렇게 떠나기 아쉬울 줄이야. 꼭 돌아와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럴 예정이다. 베를린에서처럼 마음 편했던 적이 다른 곳에서는 없었다. 다들 나한테 베를린이 진짜 좋을 거라고 했고 처음엔 동의할 수가 없었는데 그들이 맞았다. 지저분한 이 도시가 좋았다.
처음 도착했을 땐 추워 죽을 것만 같아서 며칠 벌벌 떨다가 두꺼운 자켓도 샀는데, 나중엔 가디건만 입고도 멀쩡히 잘 다녔다. 이렇게 모든 감흥이 변했다는 게 신기하다. 처음엔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숙소도 없고 내가 여기 왜 왔는지도 모르겠고, 인종차별에 사기도 당하고, 날씨 때문에 우울하고 짐을 맨날 옮겨다니느라 피곤했다. 나는 살고 싶은 도시를 찾아다닌 거였는데 살기는 개뿔 날씨 때문에 당장 며칠 더 지내기도 싫었다.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저 대단한 생존자로 느껴질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나중에는 괜찮아졌다. 조금씩 비오는 건 신경도 안 쓰이고 그냥 옷 몇개 껴입고 나가서 젖었다 말랐다 했다. 가끔씩 구름이 걷히면 그저 기분이 좋았다. 추위에도 잘 적응했고, 추워도 덜 외로우면 괜찮다는 걸 느꼈다. 짐 걱정만 빼면 호스텔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밤새 클럽 다녀와서 힘겨워하던 다음날도 은근 좋았다.
사실 클럽에서의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적당한 무관심 속에서 옷을 입든 벗든 자유롭게 다닌다. 남들과 살이 조금씩 닿으면서 은근한 친밀감을 느낀다.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같이 춤을 추다가 친해지면 서로가 가진 것들을 나눠 준다. 그렇다고 모두가 믿을만한 것도 아니지만, 다들 서로를 챙기고 불편이나 폭력을 피하고 안전을 신경쓰자는 분위기가 좋았다. 실제로 많은 클럽에 ‘Take care of each other(서로를 보살피자)’라는 문구가 쓰여있고 언제든 문제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한다. 물론 클럽 다녀올 때마다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몸이 쇠약해지는 느낌이긴 했다. 언제 어디서 이걸 또 느껴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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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앙. 꿈만 같다. 내가 이것들을 실제로 느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이 일들이 모두 나에게 일어났다고. 대충 상상만 했던 것들인데 내가 겪을 수 있어서 기뻤다. 사실 혼자 어디 여행 가서 클럽 가는 것도 쉽지 않고 거기서 시간을 즐기는 것도, 재밌는 사람들 만나기도 쉽지 않다. 사실 이게 진짜 어려운 일이 아닌가? 어디 학교 합격하는 것보다? 흠흠 오바인듯… 아무튼 어디 빌붙을 곳을 찾는 건 더 어려운데 이게 여기서는 다 가능했다. 베를린이 그만큼 열려있는 곳인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거의 그러지 못했기에… 이곳의 분위기와 환경 덕분이라고 말하겠다.
진짜 별거 아니지만, 클럽에서 먹던 사탕을 나한테 물려줬던 애가 생각난다. 물론 지저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냥 그런 순간들이 좋았다. 평소라면 그리 좋았을 것 같지 않은데 왠지 마음 편했던 순간들. 이상한 깃털 모자를 쓰고 클럽에 온 애나, 캘빈 클라인 팬티를 입었다고 클럽에서 쫓겨난 애나, 돈 뜯으려고 내 친구에게 접근했던 애나, 나보고 방탄소년단은 퀴어베이팅*을 하지 않는다며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달라던 애나… 다들 어디에서든 잘 살아있기를
*퀴어베이팅 : 비-퀴어가 ‘퀴어’인척하거나 퀴어같은 행동을 하며 사람들을 속이거나 이목을 끄는 행위. 보통 연예인들이나 방송산업에 대해서 쓰는 말로, 팬덤이 필요한 케이팝 아이돌의 주요 마케팅 전략이기도 하다. 금기를 아슬아슬 넘어서는 즐거움으로 팬들의 반응이 확실하지만, 이성애자들의 퀴어베이팅은 사회에서 억압받고 가려지는 퀴어들에게 기만적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걸로 돈을 벌지만, 퀴어베이팅과 퀴어의 인권 보장은 별개의 것이라 문제적이다. 예를 들어 수많은 남자 아이돌과 댄서 아이키, 가수 해리 스타일스 등이 퀴어베이팅으로 많은 지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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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깨달았는데 제가 베를린 사진을 거의 공유를 안 했네요.
소소하게 제가 좋아하는 사진이 많아 왕창 올립니다. 늘 사진을 고르려고 한 두 시간은 쓰는 거 같아요. 하지만 재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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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플레이리스트 공유를 하네요. 이건 베를린 클럽에서 들은 노래들, 생각나서 들은 노래들, 거기서 만난 친구들에게 추천받은 노래, 같이 들었던 노래, 새로 나온 노래 등등... 베를린에서 저의 추억들을 총집합해놓은 플리에요. 들뜨면서 우울하기도 하고 괴상하기도 하고 차분하기도 하고 뜬금없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플레이리스트 제목 'it's a berlin thing'은 제가 실제로 들은 말인데요. 클럽에서 나와서 혼자 셀카를 찍고 있었더니 누가 소리지르면서 저한테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원래 베를린 클럽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이지만 입구에서 한참 떨어져서 찍고 있었거든요. 그 사람이 하던 말은, 클럽 근처에서도 찍지 말아라, 원래 베를린 애들은 사진을 잘 안 찍는다, 너 베를린 처음 왔냐, 진짜 부끄럽다, 뭐 이런 거였어요. 좀 재수없는 상황이죠. 걔도 딱 보니 베를린 출신은 아니어보이던데, 암튼 저 말이 짜증나면서도 웃기고 그래서 머릿속에 오래 맴돌았어요.
그래서 플레이리스트로 만들어보았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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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슬로로 떠났습니다. 가는날 아침 8시까지 클럽에 있었어서 약간 몸이 힘들어했지만 ^^ 푹 자고 공항으로 출발했어요.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더라고요. 오슬로는 노르웨이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데 인구가 1백만 정도 돼요. 사실 막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죠. 그래서 도시 전체가 차분하고 조용한 것 같아요. 매일이 흐리고 비가 왔어요.
노르웨이는 석유 때문에 진짜 부자 나라라서 모든 게 경악스럽도록 비싸요. 그게 제 첫 인상이었어요. 그래서 돈을아주 아주 아끼고 다녔습니다. 이런 부자 나라 애들이 부러운 점은, 해외 나가면 다 싸게 느껴질 거라는 거에요. 그러면 여행도 이주도 좀 더 쉽고 마음 편하겠지요. 여기 애들은 네덜란드 가서도 싸서 좋다고 하네요…
오슬로 루프트하븐 뭐시기 (공항 이름이었던 듯)
09.25.일 밤 10시 반
면세점에서 화장품 하나를 집었다
환율을 검색해보니 10만원이었다
놀라서 집어던지고 싶었다
물론 그러면 안된다
돈내야되니까
친구 집 가는 열차 티켓을 사야만 했다
무임승차는 불가능해보였다
지독하게 깔끔해보이는 이곳 영혼없다
빠져나갈 틈도없다 쉣
공항에서 중앙역까지 가는 티켓을 왕복으로 끊었다
210크로네… 감이 잡히지 않는다
침착하게 네이버로 환율을 검색해보니 미친 28000원이 넘었다
고작 기차 주제에 진짜 경악스러워서 소리지르고 싶었다
아아아아아아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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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에는 친구 로키가 살아요. 이 친구 땜에 이 뜬금없는 도시에 간 것이에요. 4년만에 보는 건데 최근 트랜지션을 해서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뒤늦게 깨달은 점은, 바뀐 이름을 한번도 입으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처럼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어보고 막 그랬어요. 그리고 이 시스젠더 사회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많은 불편함과 고민에 대해 나눴어요.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다보니까, 누군가와 이렇게 깊게 말해본적이 있었나 싶네요.
09.28.월 오후 3시
things are a lot easier than we fear. let's think this way.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울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위에 말은 로키가 같이 밥먹으며 해줬던 말이에요. 더이상 she가 아니라 he로 살아가는 그나, they로 살아가는 저나 힘들게 헤쳐나가야 할 일이 많더라고요. 너무 막막하고 절망적일 때가 많지만 앞으로 저 말을 늘 기억하면서 행동하려고 해요. 호호호호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께 부탁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더이상 저를 남성/남자로 보거나 어떤 남성 카테고리에 껴서 생각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남성과 여성 둘 다 아닌 것 같다는 느낌으로 10년도 더 넘게 살아왔지만 이런 걸 말할 기회가 잘 없었어요. 저의 소통창구 인스타에 마구 말을 쓰고 싶다가도, 주변에 생각보다 많은 트랜스 혐오자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고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여기에다 대고 말할 수는 있겠죠?
유럽에 있으면서 제가 얼마나 이것 때문에 평소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깨달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남자/여자 줄 나누기나 화장실 가기, 목욕탕과 수영장 가기 등 얼마나 많은 게 싫고 끔찍했는지 모르겠어요.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이게 제 정체성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가끔씩 이게 세상의 기준에서 너무 별거 아닌 것 같고, 이것 때문에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닌지 고민했을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최근에 이건 제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계속 제가 속으로 겪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말하겠습니다.
제가 게이라는 말보다 '퀴어'라는 말을 더 쓰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보다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더 앞세우는 건 가려지는 것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에요. 게이라는 말은 너무 동성애적이고 저를 남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아서 쓰기를 주저할 때가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퀴어라는 조금 더 넓은 개념을 사용하도록 하겠어요.
혹시나 제가 너무 남자같아 보인다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사람의 겉모습으로 젠더를 판단하는 일을 잠시 되돌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렸을 적 교과서에도 나오듯 젠더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개념입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지는 것과 다르게, 우리가 속으로 느끼는 건 늘 변하고 더욱 깊고 다양합니다. 어떤 성별로 태어나서 억압받고 강요받는 사회를 지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사회가 되기를 바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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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월 저녁 7시
늘 논비건 버거가 더 싸다
프랑스에선 거의 없었지만 독일에서 비건 치즈 많았고 맛있고 충분히 쌌다
그래도 논비건 치즈가 더 많고 더 싸다
아이고 목숨값이 싸다
누군가의 죽음이 있고 없음을 가격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다
착취가 붙을 때마다 가격이 내려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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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에서 있던 시간은 좀 짧아서 통으로 비는 날은 이틀이었어요. 첫째 날에는 둘이 같이 여기저기를 걸어다녔고, 둘째 날에는 로키가 수업을 듣는 사이 저는 혼자 일을 하다가 근처 호수에 갔어요. 오슬로 지하철 끝쪽에 집이 있는데,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아주 큰 송스반(sognsvann) 호수가 있어요.
이 호수는 매우 크고 스칸디나비아적으로 생겼는데, 도시 근처에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와요. 막 바글바글하진 않고 러닝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네요. 그리고 이 호수를 기점으로 대자연의 시작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트레킹이나 캠핑을 하러 여기를 온다고 해요. 그럼 막 호수를 지나 산속에 들어가서 며칠 지내고 오는 거에요. 저한테 이런 건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어서 너무 신기하네요. 그냥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즐기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하지만 나도 여기서 세 네 시간을 여유롭게 걸어다녔으니 만만치 않게 부러운 존재다 이말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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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선 친구가 주말에 '퀴어 킹크 파티'에 간다고 해서 같이 쇼핑을 하러 갔어요. 어덜트샵... 섹스토이샵... 페티쉬 샵... 뭐라고 해야 하죠...? 아무튼 노르웨이는 너무 비싸서 아무 것도 못 샀지만 신기하고 흥미로운 것이 많더라고요. 베를린 가서 살걸 그랬어요 베를린이 딱 그걸 위한 곳인데... 그래서 적어본 ⬇️
베를린에서 하고 싶었는데 못한 것 :
1. 비건즈 슈퍼마켓 가기 - 간 날은 죄다 휴무였음
2. 타투 받기 - 찾아본 사람들은 다 예약이 차있었음
3. 머리 바꾸기 - 생각만 하고 실천을 안했음
4. 비건 (대체육) 케밥 먹기 - 자꾸 다른 메뉴를 먹어버렸음
5. 킹크 쇼핑하기 - 너무 뒤늦게 생각났음
쇼핑하면서 로키 친구들도 만나고 인도 음식도 먹었는데요. 친구들도 같이 파티 가느라고 이것저것 사는 모습이 귀여웠어요. 이 시간이 정말 편했던 건 다들 호칭과 대명사에 엄청 신경 써서 안심되고 그랬어요. 로키 덕분이죠... 춥고 축축했지만 행복한 3박을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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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고 춥다. 결국 감기에 걸렸다. 우산을 괜히 안 쓰고 다녔나. 신발이 잘 젖었지만 로키가 빌려준 두꺼운 양말을 신으니 더이상 젖지 않았다.
건물들이 겨울왕국 2 배경지를 닮았다. 실제로 노르웨이가 배경이라더라. 엘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여름인간인 내가 가본 가장 추운 나라가 되겠다. 실제로 나는 여름이 아닌 곳으로 여행을 가본 게 이번이 처음이다. 파리-베를린-오슬로. 물론 그 전에는 주구장창 여름 속에 있었고 그게 원래 목적이었다. 바르셀로나-니스-칸-몽펠리에 등등.
생각보다 흐린 날씨도 분위기 있고 좋다. 쫄쫄 굶고 다니니 노르웨이도 비싸지 않다. 아니 그래도 비싸긴 하다.
같이 먹었던 비건 도넛이 계속 생각난다. 맛있었지만 미치도록 비쌌다. 비싸서 더더욱 생각나겠지.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슬퍼지는 이유는 잠시라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오지은서영호 - 404 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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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러고 오슬로를 떠났습니다. 이제 진짜 한국에 갈 시간... 처음에 '집에 돌아갈'이라고 썼다가 저는 제 집을 다른 곳에 두고 싶어서, 또 한국이 원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주술적으로 바꿔 써보았어요 ㅎㅎ 근데 바로 돌아가진 않았고 바르샤바 1일 경유해서 돌아갔어요.
아찔했던 점은... 오슬로->바르샤바 비행기가 10:45, 바르샤바->서울 비행기가 12:20이었는데 제가 이걸 바꿔서 알았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열두시 출발이면 열시까지 오슬로 공항에 가자~ 하고 10시에 도착을 했는데 웬걸... 시간표에 40분 후 출발이라고 되어있는 거에요... 진짜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죠. 그래서 황급히 뛰어갔는데 진짜 다행히도 아직 수하물을 받고 있어서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겨우 살았어요 ㅜㅜ
살면서 비행기를 놓쳐본 적이 한 번 있는데 (그럴 뻔한 적은 많음) 호주에서 국내선 타는데 1시간 전에 수하물을 보내버리더라고요. 그래서 엄청 화났던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오슬로 공항은 저를 살려주었습니다... 인구가 적어서 공항도 덜 복잡하고 아주 굿이었어요... 진짜 다음부턴 이러지 말아야지... 여러분도 조심하세요
아무튼 바르샤바에서 또 다시 하루를 보냈어요. 저번 첫번째 경유 때처럼 막 신선하고 흥미로운 느낌은 아니었고 춥고 비가 왔어요. 먹고 싶은 걸 먹고 사야될 걸 사고 딱 그 정도만 했습니다. 물론저녁까지 해야할 일이 있어서 하루 전체를 즐기지는 못했지만요.
바르샤바는 식비가 진짜 싸고 비건 식당이 많은데 공산품은 다 비싸요. 그래서 쇼핑은 하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화장품이나 옷, 전자기기 등의 공산품은 대부분 유명한 유럽 도시들보다 비싸요. 요상하리만큼 아시아 음식점이 많으니 비건 스시나 비건 라멘 등등을 먹으러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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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수 새벽 1시 반
doping (도피-잉?)
도피를 하고 나면 내가 늘 돌아오는 곳이 있다. 두 가지 생각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나는 도망가는 게 아니라이게 그냥 길이구나 싶을 때고, 하나는 이제 돌아가야겠다 싶을 때다. 여행 전반에 걸쳐서 내 마음은 첫번째 같았고 지금은 두번째 같다. 그렇다고 첫번째가 없어졌다는 건 아니고 지금이 두번째의 타이밍이라고 느낀다.
친구들 혹은 가끔 가족들의 얼굴을 애써서 떠올리지 않으면 지금의 나에게 퍽 그리운 것이 없다. 그런 길거리-그런 사람들-그런 옷-그런 방 생각이 슥 날 뿐이다. 하지만 이럴 때 돌아가면 꼭 감격스러운 것들이 있겠지. 스시가 아닌 김밥과 순두부찌개 같은 것. 내년 혹은 그 이후의 미래는 아직 모르지만 당분간 한국에서 지낼 날들이 괴롭진 않을 것 같다. 수많은 불안 끝에 해야할 것을 받아들였고, 해내고 싶은 것들이 단단해졌다. 대신 약은 조금 더 센 게 필요할 수도 있겠다. 전처럼 다시 죽고 싶어지진 않았으면 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서도...
유럽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왜 나에게 소중한 인연은 꼭 여러 개가 아니라 한명 같은지 모르겠다. 꼭 n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확률로서의 1처럼 느껴진다. 누구는 나와 비슷하고 누구는 나와 다르지만 짧은 시간 동안 함께 뭔가를 나눌 수 있어서 고마웠다. 확실히 더 오래보고 싶은 이들이 생겼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친절도, 그들에게는 별거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매우 큰 것으로 다가오기에 고맙다. 우리의 인연이 언젠가 다시 닿기를. 이라고 쿨하게 말하고 싶지만 나는 또 그곳을 어떻게든 찾아갈 기회를 기다리겠지. 그때의 서로는 또 다른 곳에서 마주할 테니 더 재밌겠지. 캘리포니아나 뉴욕 같은데도 가보고 바르셀로나 베를린 오슬로도 다시 가고.
나는 이미 내가 살아온 곳과 때를 떠나왔다. 그렇기에 영영 떠나는 것은 매번 있어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 두렵지 않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멀리 떠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들을 저버리진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앞가림에 대한 선택을 할 힘이 생겼을 뿐. 내게 두려운 것은 최저임금과 월세 간의 부조화, 집을 어디서 얼마에 구해야하는지 그런 것들… 서울이든 서울 밖이든 해외든 어쨌든 그런 것들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얼레벌레 이뤄질 것들이기에 세상에 맡기려고 한다. (투표를 대충 하겠다는 건 아님) 나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안에서 열심히 고민하고 씨름하다 가끔씩 이 선택지가 전부인지 두리번거리는 일을 하고 또 고민할 것이다.
근데 여기서 밖을 두리번거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미치도록 내 삶을 살고 싶어해왔다. 그것이 가정 속에서, 학교 속에서, 이웃 속에서, 사회와 제도 속에서 너무나도 힘들었기에 내가 숨쉴 수 있는 선택지를 늘 찾아 헤매고 싸워야만 했다. 지금 급속도로 선택지가 넓어진 상황에서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로도 나는 편하게 숨쉴 수 있게 되었다. 누구보다 내가 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속도에 상관없이 단단한 내가 되어가고 있다. 조금씩 작은 틀이라도, 약간의 금기라도 깨어나가는 중이다. 그래야만 내 세상은 열릴 것이기 때문이기에.
이 단단하게 미쳐버린 세상에서 허억- 소리나는 일은 사실 별거 아니다. 쟤 유럽 갔더니 미쳤나? 애가 망가졌다, 선을 넘었다, 하는 일은 이제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다. 원래 자유로움이란 넓고 깊은 개념이자 감정이자 상태는 곧은 길로만 갈 수가 없어서 혼란 끝에 얻어진다고 믿는다. 그렇게 나는 기꺼이 혼란을 겪었고 다른 혼란을 겪기 전 지금 자유롭다고 느낀다.
지금 내게 제일 생각나는 건 못 먹은 비건 스시와 내일 환전 어떻게 할지 정도이지만 사실 아침 비행기를 위해 닥치고 빨리 자야한다. 그럼에도 내 마음에는 넘쳐흐르는 말이 많고, 특히 밤에 넘쳐 흘러 수면제로 아픈 머리를 붙잡고 수습을 한다. 그리고 이 생각과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눈깔 아프게 이짓을 하고 있다. 다 쓰고 나니 슬긋 미소가 지어진다. 다들 기다리게 하고도 이 글이 그래도 조금은 소중하겠지, 의미가 있겠지, 하며 열심히 글을 쓴다.
아티스트의 디스코그래피, 작가의 메모와 일기장, 누군가의 회고록. 늘 삶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은 소중하다. 내 아카이빙이든 남의 아카이빙이든 삶이 거기에 들어가있으면 난 거기에 만족한다. 그렇게 충실한 아카이버로 살아온 2달의 시간은 내가 이짓을 이 형태로든 다른 형태로든 이어나가고 싶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내 기록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들여다 보는 사람에게도 좋은 자극, 혹은 거울, 혹은 시사점, 혹은 심심풀이라도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러니 내 인생과 내 아카이빙 좀 더 이어나가보겠다. 아주 굳은 다짐. (졸려서 처음에 겨짐이라 잘못 씀)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지만, 있다면 그것에 너무나도 고마워할 것. 이미 고마워하고 있음. 다음엔 어떤 형태로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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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앤 바르샤바 지출일기
1일차 : Oslo
210 - 공항철도 왕복 🚆(약 28,000원…)
124 - 버거킹 🍔 (약 17,000원…) : 처음에 공항 버거킹은 비건 옵션이 품절돼서 혹시나 하고 중앙역 가봤는데 다행히도 비건 옵션이 세개나 있었다. 그래 이정도면 죽을만큼 비싸진 않다... 대신 아플 만큼 비싸다...
➡️ 총 334크로네
2일차
139 - 점심 🌮 : cultivate food. 노르웨이 치고 굉장히 착한 가격의 식당! 디저트도 많다!
106 - Talormade 🍩 : 도넛 하나에 50크로네, 약 5유로, 약 7천원이 넘는 잔인한 이곳... 그치만 맛있다...
51 - 선물
179 - 슈퍼마켓 : 슬프게도 슈퍼마켓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말도 안돼 한국이 얼마나 비싼거야.
➡️ 총 475크로네 (809)
3일차
95 - 커리 🍛 : 역시 이민자들의 식당이 최고다...
159 - 바 🥃 : 진짜 가격 보고 충격 먹었다.
➡️ 총 254크로네 (1063)
4일차 : Warszawa
13.6 - 교통카드
7.0 - 빵집
45.0 - Lokal vegan bistro 🌱 : 메뉴 두개 먹었는데 이래봤자 만원 조금 넘는다.
➡️ 총 65.6즈워티 (약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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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 마지막 화가 되어서야 드디어... 피드백과 웅앵웅 버튼을 작동시키게 되었습니다. 스윽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이버 메일 답장도 좋아요. 여태까지 보낸 메일을 모아볼 수 있는 페이지도 만들었어요. 공유와 배포는 살짝 삼가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ㅎㅎ 그럼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조만간 새로운 소식 들고 올게요, 다음에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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